슬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슬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Photo by Borja Verbena / Unsplash

어디다가 이야기하기 민망한 사실이지만, 어쩌다보니 회사에서 AI 전문가 포지션(?)이 됐다. 클로드 코드 이야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녔더니 쉽게 말하는 만큼 쉽게 다룬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건 내 불찰. 나도 잘한다는 친구에게 몇 시간씩 배우고 이것저것 시도하느라 토큰도 날려먹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그 ‘여기’가 그리 전문성 있는 수준도 아닌 듯하다) 점심 식사도 자주 하고 가까이 지내는 두 분에게 클로드 코드 간단 사용법을 알려주었더니 소문은 더 파다해졌다. 매일 야근하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퇴근하는 나를 보며 ‘일을 진짜 효율적으로 하나 보다’라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진짜 용쓰고 있는데 기가 찰 일이다.

얼리 어답터를 자처하며, 웬만하면 기술 수용적인 나지만 AI 광인(?) 취급을 받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일단 전문가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뭔가 선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고, 업무 효율화와 자동화에 앞장서는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 또한 퍽 부담스러운 일이다. 당장 SNS만 돌아다녀도 AI를 어마어마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나는 AI가 가져올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전부 목숨 걸고 AI 공부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말야.

변화는 이미 왔다. 당장 신입 채용이 눈에 띄게 줄었다. 현장의 말을 빌리면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가르쳐야 하는 신입 두세 명 보다,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여럿 부리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어차피 반복적이고 품 드는 일을 시킬 거라면 말이다. (돈도 많이 아낀다. Claude Max는 200달러밖에 하지 않는다.) 신입을 뽑느니 3년 정도 경력에, 도메인 지식이 있으면서, 그걸 인공지능에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가장 중요)을 뽑는 게 낫다고 보는 회사들이 대부분이다. 우울한 문장을 하나 보태자면, 사람을 뽑는다는데 채용 공고엔 인공지능 이야기가 더 많은 현실이다.

기업들은 앞다퉈 AI Native 조직으로의 변화를 선언한다. IT 기업이 아니라도 말이다. (당장 우리 회사 개발팀도 AX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CTO가 아니라 CAIO를 두는 조직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너댓 곳이다. AI 사용을 단순한 기술 전환 정도가 아니라 조직문화와 구조의 변화로 보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봐도 현명한 선택이다. 조직이나 사람들을 바꾸지 않고 AX를 외치는 건,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고서 나는 깨끗하다고 외치는 일과 같다.

사람들은 이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는 인간과, 인공지능을 잘 쓰는 인간의 싸움이다. 누가 이길까? 싸움의 극초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인간이 인공지능 없이 홀로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나를 보는 누군가들은 내게 ‘전문가’라거나 ‘인공지능 잘 쓰는 사람’,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공부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어서, 어쩌면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지 슬퍼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자. 오늘부터 AI 사용 하지 맙시다. 약속하는 겁니다? 이건 기후위기를 위해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막자는 전 세계 조별과제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AI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으니까, 선택권이 있는 일도 아닌 것 같다. 도심에서 비둘기가 제비를 쫓아내고 살아남은 것은 비둘기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비둘기와 제비가 결정할 수 있는 일 바깥에서 거대한 환경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 뿐이다.

지난해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책 전반에 서려 있던 무력감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한다. 프로 바둑 기사들은 알파고 출현 이후 AI의 기풍, 그러니까 바둑 두는 방식을 몸소 익히기 시작했다. 초반 30~50수까지 ‘AI처럼’ 두지 않으면 바둑 시합에서 이길 수조차 없게 되었다. 조혜연 9단은 AI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부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AI 공부를 안 하면 시합에서 한 판도 못 이겨요.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서 승부를 하는 사람은 이 AI 시대를 무한긍정하면서 가야 하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AI 수법을 거부하고, 이걸 공부하느니 나는 그냥 바둑을 안 한다고 하는 분이 꽤 많아요. 제가 알기로 10명 이상인데 저는 그분들을 부러워하면서 AI 공부를 해요.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조혜연이 AI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저는 슬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먼저 온 미래>, 장강명)

나도 마찬가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AI 공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 테지. 그러나 나는 인간성의 변화(소멸이라고 썼다가 지운다)를 충분히 애도하면서, 매일같이 공부하고 있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링크드인에서 보고 저장해 둔 에이전트 구성법을 따라해 볼 요량이다. 이제는 아마 그런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것이다. 인간성의 변화를 느끼면서 공부하는 사람과, 무작정 공부하는 사람. 슬퍼하면서 공부하는 사람과, 그냥 공부하는 사람. 가능하다면 계속 슬퍼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인간성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