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하고 지독한 홍대병의 역사

유구하고 지독한 홍대병의 역사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23XkM3zVFk0

친구들과 함께하는 취향 공유 모임 카톡방에 릴스 하나가 올라왔다. 한 친구는 나를 태그하며 “잘난 애로 인정받았네”라는 말을 덧붙였다. 주혜린의 음악을 소개하는 릴스였고, ‘요즘 잘난 애들은 다 주혜린 듣는다’ 같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연말 모임 시간에 올해의 음반이라며 주혜린의 음반을 강력 추천했던 터라 친구가 기억했나보다. 몇몇은 내가 한 얘길 잊었는지 ‘누군데?’ 라며 되묻기도 했다. 취향이 멋지다고 인정받는 건 좋아야 정상인데, 괜히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또 한 명을 떠나 보내는가. 주혜린도 나에게서 멀어지는가? (가까웠던 적 없음) 유튜브의 주접 댓글이 떠오른다. 유명해지지마.. 아니야 유명해져.. 같은 댓글들 말이다.

이렇게 긴 문단을 할애한 이 현상과 나의 마음은 단 세 글자로 말할 수 있다. 홍대병. 누가 만들어낸 말인진 모르겠지만 과거 홍대 앞 인디씬 문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 나 또한 홍대 출신 인디밴드들을 정말 좋아했다는 점에서 실로 적절하다. 이제는 홍대 앞에 인디 씬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 유구하고 지독한 홍대병을 언제부터 앓았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첫 기억은 중학생 때. 사실 나의 인생 자체가 홍대병이었고 - 이걸 설명하려면 또 한 편의 글이 필요하다. 대안학교를 다녔다는 말로 갈음하겠다 - 우월의식이 아니더라도 남들과 다르다는 게 나에겐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였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브로콜리너마저’가 첫 앨범을 냈다. 어떤 경로로 그걸 듣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누나가 쓰던 삼성 yepp mp3에 정규 1집을 담아 듣던 기억이 선명하다. 씨야라거나 SG워너비 노래를 안 듣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보다는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라거나 ‘유자차’, ‘춤’, ‘봄이 오면’ 같은 노래를 심각하게 좋아했다. 기타로 그런 노래들을 쳐보곤 했다. 친구들은 늘 무슨 노래냐고 물었고, 나는 늘 브로콜리너마저를 소개했고, 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훗, 당연히 니네가 알 리가 없지. 난 그걸 즐겼던가?

한국식 정통 발라드나 2세대 아이돌 노래를 잘 모른다는 게 우월의식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소녀시대 멤버를 다 모른다는 사실에 안심했던(지금 생각해보면 꼴깝임)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그때부터 중증이었던 건 확실하다. 지금이야 좀 증상(?)이 나아진 것 같다만, 내 증세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다수의 취향을 잘 모른다는 데서 느끼는, 허세 같은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나를 분석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나의 특별함이라든지 어른스러움에 젖어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른들은 ‘제 나이’에 맞는 무언가를 늘 원하지만, 애초에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교육이라는 일반적 경로를 벗어나버린 나의 삶에서 ‘제 나이에 맞는 것’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두발 자유가 없던 시절에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평일 낮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비행청소년(?)으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성격적으로도 그렇지만 취향이나 좋아하는 것이 자리잡힐 시기였으니 나의 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후로도 나는 루시드폴이나 요조, 타루(진짜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다!), 박새별, 선우정아 같은 가수들을 좋아했고 그들이 유명해지는 낌새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떠나보냈다. 10CM도 ‘아메리카노’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좋아했고, 멜로망스도 ‘선물’이 뜨기 전까지 좋아했고… 나만의 가수가 대중의 가수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의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병세는 더 깊어졌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아니고는 그들의 변화와 별 관련이 없을 텐데도 말이다. 홍대병이 취향에 관한 우월 의식에만 직결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비주류라는 내 가장 큰 정체성이 희석되는 게 무서웠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대한 자기방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병세는 어떤가 묻는다면… 아저씨처럼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얘들 다 똑같이 생겼는데? 중학생이라고? 이런 말을 말을 입에 붙이고 삼) 적어도 유명한 케이팝 노래는 찾아들어보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대중문화까지 섭렵한 나에 취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럼 이건 홍대병에 대한 홍대병일지도. 이젠 다들, 자기 취향의 우월함이나 세밀함을 말하는 시대니까, 나는 그걸 이미 넘어섰으며, 대중문화까지 잘 이해하고 있어. 이런 마음일 수도 있는 걸까나. 결국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맥락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메타홍대병에 단단히 걸려버린 나… 누가 보면 특약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하겠지.

홍대병 십수년차, 내 특이 취향(?)과의 공존을 받아들이고 잘 활용하는 게 나에게는 더 나은 방식이라 믿는다. 어느 때엔 우쭐하기도, 어느 순간엔 지독한 병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나 싶다. 애초에 비교 없이 취향을 가지는 게 가능한가? 남들 취향과의 비교가 아니라 과거의 나, 미래의 나를 예상하는 방식으로 즐기는 게 필요하겠지. 홍대병이 나에게 꼭 해로운 병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유구하고 지독한 나를 만들어준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는, 어쩔 수가 없다.

P.S. 주혜린도 떴으니 나의 다음 픽... NEW GIRL을 소개한다. 나중에 또 우쭐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