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오면 이별을 하자

4월이 오면 이별을 하자

거짓말 같은 입대였다. 4월 1일 당일에서야 몇몇에게 연락을 돌렸다. 만우절 거짓말이냐며 믿지 않았지만, 그대로 입소한 나는 답장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답장이 며칠 없고서야 믿었을 것이다. 진짜구나?

훈련소에서 2주쯤 지났을까. 연병장에 있는데 한 사람을 찾는 방송이 나온다. 내 옆옆자리에서 자던 동기였다. 훈련이 끝나고 들어오는데, 채 닫지 못한 관물대 문이 보인다. 급하게 나간 흔적이다. 훈련소에서 나갈 수 있는 건 건강상 이유나, 경조사 정도가 전부다. 무슨 일이려나. 별일 아니겠지.

그날 저녁에는 이런 방송이 나왔다.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내용. “훈련병 가족이나 친지 중에 안산 단원고등학교를 다니거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행정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그 일이 옆자리 동기와 연결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그의 외삼촌이 세월호에서 학생들을 먼저 내보내다 순직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수료식은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바깥공기를 마신다는 생각에 들떴다. 허용된 장식 외에는 달아서는 안 되는 군복 왼쪽 가슴에 노란 리본이 달렸다.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리본을 단 채 수료식을 마쳤다. 외출하니 세상이 온통 노랗다. 한 블록마다 하나씩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비통함은 뚜렷이 기억한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초상집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겪었던 별 것 아닌 이별들로, 그 수백수천의 이별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다면 그냥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힘을 보태야겠구나, 그것도 안 된다면 그냥 함께 서 있거나 울어주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싶어서 노란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그걸 달고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자기 이별에 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많이 들으면 아픔을 잘 이해하게 될 줄 알았다.

무슨 용기였는지 교회에서도 달고 단상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좌파라느니 자유주의자라느니 하는 괜한 오해를 받은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별의 아픔 같은 걸 잘 이해해 보려고 기자 생활을 하며 나를 이런저런 사건 공간에 둬 보기도 했다. 한 사건이 내게 이렇게나 큰 힘을 발휘했다는 건, <생일>이라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 같다.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다니던 교회에는 늘 힘없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있었다. 여느 일요일이었던가. 다른 이에게서 그가 세월호 생존자임을 전해 들었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아는 체할 수 없었다. 본인 입으로 그 이야길 한 건 오래 지난 뒤였다. 그때 이후로 버겁기도 하고 살만하기도 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아무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붙이지 않는 게 나았다. 취재하며 만난 세월호 유족들 눈에는 어딘가 모를 힘이 있었는데 그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조금은, 그래도 남들보다는 더 안다고 생각했는데 책 한 권만 읽고 안다는 듯 우쭐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군악대에 있었던 군 생활 초기에 가장 많이 연주했던 노래는 <내 영혼 바람되어>였다. 신나는 트로트를 메들리로 연주하다가도 마지막이 되면 꼭 성악병이 나와 이 노래를 불렀다. 추모 분위기가 몇 달이고 이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샌가 아무도 모르게, 그 우울한 노래는 세트리스트에서 사라졌지만.

4월에 들어서 날이 풀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면 그 노래를 듣곤 한다. 노래가 흐르면 앞서 적은 모든 이야기가 연결되어 재생된다. 그냥 삶을 스윽 훑고 지나간 얇은 연결고리인데도 이렇게 분명히 기억되는 건 왜일까. 늘 뒤숭숭해지는 걸 보면 그 파고가 내게 낮지만은 않았구나 되뇌어볼 따름이다.

거짓말 같은 이별이었겠지. 4월 이맘때면 그 이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 같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