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디스크님
있는지도 몰랐던 그 험한 것이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 건 군대에 있을 때부터다. 얼결에 가게 된 군악대에서는 수자폰이라는 무거운 악기를 짊어지게 됐는데 (리터럴리 짊어짐.. 이미지 참고) 보기엔 별거 아니어 보여도 15kg 정도가 나가는 퍽 무겁고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행사에 나가는 날이면 이 놈을 어깨에 지고 쭉 서있어야 했고, 행진이라도 있으면 1~2km는 거뜬히 걸어야 했으니 허리에 무리가 없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찌릿찌릿하던 허리는 전역하고서 싹 나았다. 아픔이 계속되지는 않는구나, 신은 날 버리지 않았다며 안도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가 다시 존재감을 나타낸 건 한 4년 여 전이었던 것 같다. 전 애인과 후쿠오카에 놀러간 첫날이었고, 여느 한국인들처럼 2만 5000보를 걷고 난 뒤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요추 4번과 5번 사이 추간판은 내 삶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척추 4번 5번 이렇게 써 놓으니 무슨 연애프로그램 같음)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그렇게 통증이 계속됐던 것은 아니라, 무리해서 그런 것이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그럼에도 통증은 한 달에 한두 번은 어김없이 나타났으므로 그의 존재를 잊기는 정말이지 어려웠다. 그렇게 한 1~2년이 지나고서야 직장인 건강검진을 핑계 삼아 ct를 살짝 찍어보았다. 디스크에도 번호가 있다는 건 그때야 알게 되었다. 보통은 ‘디스크가 있다’고 편하게 말하지만 팽윤과 돌출, 탈출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 또한 아프지 않았다면 몰랐을 부분이다.
일을 쉬면서는 활동량이 적어지게 되자 확연히 덜 아프게 되었지만 이 또한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몸무게가 불고 아무것도 안하게 될수록 허리에는 좋기가 어렵다. 너무 움직여도 안 좋고 너무 안 움직여도 안 좋은 이 녀석을 도무지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일단은 재활 PT 전문이라는 집 앞 센터를 찾아가 허리 회복을 위한 PT를 받기 시작했다. 일반 PT가 아니라 가격이 훨씬 비싼 축이었지만, 허리 디스크 통증을 앓아봤다는 PT쌤의 화술에 껌뻑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와 수업을 진행하며 여러 운동 방법과 허리를 자극하지 않고 풀어 주는 자세들에 대해 익히게 되었다. 사실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통증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였다. PT쌤은 통증의 사회심리학적 요인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디스크의 문제와 통증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야만 하는 것, 나의 삶에 방해가 되는 것, 이렇게 살아서는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의 접근법은 어딘가 달랐다.
처음 센터에 갔을 때 내게 내민 설문에는 통증의 강도와 빈도를 숫자로 설명하라는 내용부터 시작해서,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에 자신감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지, 포기한 일은 없는지,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지’와 같은 질문이 들어 있었다. 질문을 받아든 당시에는, 트레이너 양반, 나를 아프지 않게만 해주게, 같은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PT를 받는 2개월 동안 아프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나는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도 내 몸이고, 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통증을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한다면, 적절히 어르고 달래면서, 이 때문에 나의 삶이 의기소침해질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자세를 하면 몸이 더 아플 거야, 몸이 더 망가질 거야, 라는 태도 자체가 통증을 더 만성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 해봤던 것 같다.
실제로 비슷한 정도의 부상과 질병을 앓더라도 나타나는 통증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른데, 이를 결정하는 굉장히 큰 변수 중 하나가 ‘통증이 자기에게 가지는 의미’라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행복에 통증이 적은 편이지만, 같은 부상을 입은 민간인은 부상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더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딘가 긍정의 힘 같아 보여서 이상하긴 하지만… 정신과 신체가 연결돼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진 않으니까) 나에게 디스크와 이 통증이 무엇인지 정의해보지 않았던 터라 그제야 마음가짐을 정리해보게 되었다. 그래. 너도 나의 일부니까. 내가 안고 갈 무엇인가 보구나.
물리치료나 약 먹는 것, 운동, 개조된 정신머리(?) 정도로 연명만 하다가 수백만 원의 돈을 쓰게 된 것은 지난 2월의 일이다. 새로운 회사에 출근을 2주 정도 앞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힘든 통증이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러다가는 일이고 뭐고 일상생활이 불가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척추 전문 병원에 달려갔다. 사실 달리진 못했고 허리를 부여잡고 택시를 탔다..;
심각한 표정의 나를 본 간호사는 진료를 빨리 보게 해 주었고… 그날로 입원해서 고주파 열 치료술이라는 걸 받게 되었다. 수술까지는 아니고 긴 주사를 디스크까지 넣어 고주파로 문제를 일으킨 신경 쪽을 지지는(?) 시술이라는데 솔직히 방법이나 기전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고… 어이 의사 양반, 안 아프게만 만들어 주세요… 라고 되뇌일 뿐이었다.

그렇게 2~3주를 고생하고 큰 통증은 사라지고 그 빈도 또한 줄어들게 되었지만, 허리의 불편감은 절대 사라질 수가 없는 종류의 아픔이다. 40~50대가 되면 수술을 해야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예전에 들었으면 웃어넘기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그 시기를 미룰 수 있는 때까지 미뤄야겠다는 마음 뿐.
불편하고 밉고 징하고 떼어낼 수 있다면 똑 하고 떼어내 버리고 싶지만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 몸에서 그 녀석만 도려낼 수는 없는 일. 물리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마음이라도 새롭게 먹어보자는 생각이다. 이쯤에서 정신 승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이 이렇게나 유약한 것을.. 손바닥만한 나의 디스크님에게 온 육체가 무참히 패배할 것만 같을 때는, 정신이라도 이겨놓아야지, 무승부 정도는 거두지 않겠는가 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도리가, 나로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