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번호의 옛 주인

내 번호의 옛 주인

번호를 바꾼 건 4년 전 일이다. 어쩌다가 소위 ‘골드번호’ 추첨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연말에 진행하는 통신사별 추첨에 응모해봤던 것이다. 1234나 1111 같은 좋은 번호들은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을 테니 나는 전략적으로, 비교적 애매한(?) 번호를 택했다. 그게 지금 내 번호가 되었다.

번호를 바꾸어야겠다는 강력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팸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누군가의 핸드폰 연락처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스팸은 번호를 바꾸고 몇 개월 뒤에 곧바로 재개(?)되었고, 카카오톡을 탈퇴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연락처에서 사라질 수도 없었던 탓이다. 이 초연결 사회에서 번호를 바꾼다는 건 그냥 옷을 갈아입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4567이란 뒷번호를 받아들고, 모두 같은 뒷번호를 쓰던 가족들 중에서 나만 떨어져나온 꼴이 되었다.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심 서운해했다. 번호를 왜 바꾸었냐며, 외우기가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요새 누가 번호 외우냐며, 어차피 아빠도 검색해서 전화하지 않느냐고 쏘아붙였다. 그 뒤로 번호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없었다. 내가 이김(?)

그런데 몇 달 전부터인가 내 번호로 이상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을 다시 시작하고서는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외부 소통이 많아서 별 수 없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받지 않았을 전화들을 받게 되는 탓도 있을 것이다. 통화는 대충 이렇다.

나: “여보세요?”
상대: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로) “반장님, 출발할까요?”
나: “?!”
상대: (약간 짜증난 상태) “반장님, 준비 다 됐어요.”
나: (누가 들어도 반장 같지는 않은 목소리로) “그… 전화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상대: “어? 아닌데… 죄송합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어쩌면 받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반장님’이라는 말. 초등학생 때 이후엔 반장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진지) 추측하기로는 공사 현장을 맡은 공사 반장님께 전화를 해서, 인력을 데리고 가거나 자재를 싣고 출발할지 물어보는, 뭐 그런 게 아닐까 했지만, 전화 잘못 건 사람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할 따름이다. 비슷한 전화를 서너 번은 받았던 터라 갈수록 궁금증만 늘어 간다.

내 번호의 옛 주인일까, 아니면 번호를 잘못 쓴 누구일까. 4567이라는 좋은 번호를 좋아했지만 바꿔야 했던 반장님일지, 아니면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번호를 잘못 알려준 아저씨일지는 모르겠지만… 반장님, 사람들 출발하게 좀 해 주세요. 다들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요. 다음부턴 그냥 제가 가라고 할까요? 바꾼 번호의 옛날 주인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드라마에서처럼 그런 걸 이어주는 제도가 있으면 어떨까, 상상만 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