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하나로도 바뀌는 게 삶

노래 하나로도 바뀌는 게 삶
Photo by Markus Spiske / Unsplash

종교가 내 삶에서 힘을 잃은 뒤로 나는 그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것 같다] 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 와 돌아보니 그랬다’는 결과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영적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어느 것에 의지하려고 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내 생각을 따라오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실제로 그런 존재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향성이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여느 기독교인들이 그런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기독교에 심취(?)해 있을 때, 내 삶의 모든 방향성이라든지 판단 기준은 종교적 가르침이었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이걸 ‘세계관Worldview’이라고 부른다) 운이 좋게도 내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이타심을 발휘하고 사회적 약자에 눈을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천국이라는 상징적 내세를 가정하기보다는 현실이 천국 같아야만 한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을 좇았다. 모든 종교인이 그랬다면 세상살이가 조금 나아졌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결국 종교도 (아무리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무엇을 보고 싶느냐, 의 문제가 된다고 느낀다. ‘보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그런 종교를 왜 떠났느냐고 이야기하자면 글 한 편으로 부족할 것이고 나도 나름의 정리 중에 있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내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어쩌면 방향을 설정해버린 종교에서 떠난 이후가 훨씬 중요하다. 그때의 나는 말 그대로 ‘살아갈 이유’를 잃은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나의 모든 경제적-정신적 기반이던 부모를 떠나는 일과 비슷하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타인에게 다정하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 외에는 별로 없었다. 이 종교의 가르침이 결국 무의미하다면, 나는 무얼 따라 살아야 하나? 아니, 꼭 무얼 따라 살 필요가 있나? 어느 순간엔 그 기준을 과학으로부터 찾으려고 해봤던 것 같기도 하다. 요 몇년 사이 유행했던 진화심리학이라든지, 정신의학이라든지, 천문학이라든지를 다룬 책이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말하며 나의 숨은 인류애를 자극할 때마다, 그제야 나는 내 두 번째 종교를 찾은 듯했다.

‘다정한 개체들이 살아남아 진화해 왔다’는 말로 요약되는 ‘자기가축화’ 개념이나, 인간 사이의 연결이나 친절이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수가 된다는 관점은 나를 충분히 혹하게 했다. (착하게 살 과학적 이유가 있다니!) 칼 세이건의 ‘작고 푸른 별의 하찮음’에 대한 묘사는 모순적이게도 인간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인간사는 우주적 관점에선 자질구레한 것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우주의 먼지이기 때문에, 잠깐 머물다가는 인생에 그리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까지 고뇌하고 번뇌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큰 위로였다.

그 모든 이과적 접근(?)에 여러 번 감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문송합니다 ㅠㅠ) 사람의 삶을 뒤집거나 헤집는 건 ‘사실’이나 ‘팩트’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종교가 사실이라서 내 삶을 이끌었던 건 아니니까, 일리가 있는 접근이다.

이렇게까지 글을 썼으면 무언갈 찾았다, 하고 끝나야 할 것인데 완벽하게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 내 삶의 가장 큰 기준과 방향타가 되어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뿐인데 요 몇 년 새는 영화나 문학이 내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은 종교도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니, 영화나 문학을 종교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접근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고서 존재와 상태를 뛰어넘는 우정과 연대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햄넷>을 보고 어떻게 예술의 역할과 애도의 공동체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보고 비루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내 모순적 모습을, 어떻게 마주하지 않을 수 있나!

마무리로는 느닷없지만, 요즘은 더 이상 거대한 삶의 목적을 찾지 않고 있다. 영화 한 편과 책 한 편에서 무언가 발견된다면 그런 방식으로 살아보고, 그렇지 않다면 숨 붙이는 것에만 해도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사는 게 인간이라 한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어제는 과학에서 위로를 얻고, 오늘은 문학에서 위안을 얻고, 내일은 종교에서 감화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나이며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어느 노래의 댓글에 달려 있는 “Life does truly change.”라는 말을 보고 생각했다. 노래 하나로도 바뀌는 게 삶이다. 바랄 수 있다면, 어제보단 좀 더 나은 쪽으로 바뀌길 바랄 뿐이다.